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온 왕국 (문단 편집) ==== 형제간의 골육상쟁 ==== [[페르난도 1세]]는 생전에 상속인 사이에 왕실 소유물을 분배하는 것을 금지한 서고트 및 레온 법 대신 왕국을 분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나바라 법 원칙을 따르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장남 [[산초 2세]]는 카스티야를 물려받았고, 차남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물려받았으며, 3남 [[가르시아 2세]]는 [[갈리시아]]를 물려받았다. 여기에 누이 우라카와 엘비라는 평생 결혼하지 않는 대가로 각각 사모라와 토로를 영지로 수여받고 왕실에 속한 모든 수도원의 수입 일부를 받을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장남 [[산초 2세]]가 자신에게만 유산이 상속되어야 했는데 다른 형제들에게도 영토가 분배되어 버려서 카스티야에서만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불만을 품으면서, 형제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067년 11월 7일 세 형제들을 중재하던 모후 산차 왕비가 사망하자, 산초 2세는 본격적으로 골육상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068년 5월 1일 알폰소 6세가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공격하느라 레온 왕국을 비워두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바다호스 타이파 알 무자파르와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왔다. 1068년 7월 19일 피수에르가 강 인근의 린타다 전투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이 전투의 승자가 상대방의 왕국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전투 결과 산초 2세가 승리했지만 알폰소 6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알폰소 6세가 1069년 5월 26일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을 때 산초 2세가 결혼식에 참석한 것을 볼 때 곧 화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71년,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막내 동생 가르시아 2세가 다스리던 갈리시아를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하고 힘을 합쳐 갈리시아로 쳐들어갔다. 갈리시아 2세는 두 형의 공세에 패배하고 포르투갈 중심부로 도주했다가 산타렝에서 산초 2세에게 체포되어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 그 후 갈리시아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 의해 양분되었다. 포르투갈 백작령은 알폰소 6세의 레온 왕국으로 편입되었고, 갈리시아는 산초 2세의 카스티야 왕국에 편입되었다. 또한 양자는 3년간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산초 2세는 약속을 어기고 엘 시드와 함께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미처 대항하지 못하고 사로잡혔고, 산초 2세는 레온에 입성한 뒤 1072년 1월 12일 레온 국왕에 즉위했다. 그 후 여동생인 사모라의 우라카의 중재에 따라 알폰소 6세를 사하군 수도원에 유폐시켰지만, 알폰소 6세는 페드로 안수레스 등 몇몇 귀족들과 함께 탈출한 뒤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의 궁정에 망명한 뒤 그곳에 수 개월간 지냈다. 산초 2세는 자신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는 레온 귀족들을 진압하는 한편, 누나 우라카 역시 자신에게 반기를 들 거라고 의심했다. 그는 우라카에게 사모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고 명령했으나 거절당하자 반역자와 밀통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군대를 동원하여 사모라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던 1072년 8월 7일, 산초 2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벨리도 돌포스(Vellido Dolfos)라는 귀족이 사모라에서 카스티야군 진영에 들어간 뒤 산초 2세에게 도시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산초 2세는 이를 믿고 그를 따라가다가 돌연 손에 쥐고 있던 황금 창을 빼앗기고 창에 복부를 찔러 사망했다. 돌포스는 엘 시드의 추격을 피해 곧바로 사모라로 돌아와서 우라카를 향해 "도냐 우라카, 약속을 이행할 때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 히스파니아 역사의 주요 사료로 취급되는 <로데리크의 역사(Historia Roderici)>에는 산초 2세의 사인이 암살이었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많은 학자들은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을 의심하며, 그가 공방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거나 병에 걸려 죽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후대의 많은 전승과 연대기에는 알폰소 6세를 산초 2세 암살 사건의 배후라고 지목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설령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고 해도 당시 톨레도에 멀리 망명한 그가 산초 2세를 처단하는 데 관여하기 어렵다며, 사모라의 우라카가 배후라는 이야기가 더욱 그럴듯하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우라카가 알폰소 6세와 비밀 협의를 하고 산초 2세를 암살한 뒤 알폰소 6세를 왕으로 옹립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산초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기존에 맡고 있던 레온 왕국에 더해 형이 군림했던 갈리시아-포르투갈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을 겸임했다. 13세기 후반에 카르데냐 수도사들이 작성한 연대기인 <카르데냐의 전설(Cardeña Legend)>에 따르면, 엘 시드는 모두가 보는 광장으로 알폰소를 부른 뒤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이 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만인에게 발표하라고 했다. 알폰소는 엘 시드의 지시에 따른 뒤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데리크의 역사> 등 신뢰성이 높은 사료들에서는 이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일화가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한편,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가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하고 풀려난 후 세비야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의 궁정으로 망명했던 [[가르시아 2세]]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가 서로 전쟁을 벌이느라 자신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세비야 타이파의 후원을 받으며 갈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073년 2월 13일 자신과 만나서 협상하자는 알폰소 6세의 제의를 따랐다가 알폰소 6세가 파견한 군대에 체포된 뒤 루고 성에 투옥되어 1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090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6세는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 포르투갈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